다음 소개하는 수필은 평론가이며 수필가이신 이유식 교수님의 하동(옥종)소재 수필입니다.
평사리 토지문학제 추진위원장을 3년째 맡아오시는 교수님의 호의로 이번행사에 참여했던 고마움을 표현코자 교수님의 수필집 [찻잔너머의여자] 중에서 골라서 소개해 봅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반딧불의 서정>
우리 나라 사람들의 똥에 관한 연상력과 상상력은 예민하고 유별나다. 벌레 이름과 새 이름만 보아도 온통 똥을 연상시킨 이름이 많다.
이런 똥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밤하늘의 유성조차 별똥별이라 했으며, 콧방귀를 뀐다고도 했고, 잇똥, 불똥, 귓똥이란 말도 있는 걸 보면 눈꼽똥이나 손톱똥 그리고 발톱똥이라 하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이상스러울 정도다,
여기서 개똥벌레란 이름을 한번 생각해 보자. 물론 일명 반디라고도 불리지만 밤하늘을 호롱불처럼 장식해 주는 이 벌레가 노상 개똥벌레라 불리고, 또 가수 신형원의 노래에서조차 개똥벌레라고 불리고 있으니 좀 억울한 감이 든다.
개똥벌레는 귀뚜라미와 매미가 수컷만 우는 것과는 달리 암수가 다 발광체를 가지고 있다.
숲에서 숲으로만/무엇을 찾아선지/파릇한 불을 달고/깜박깜박 떠다니는/반딧불 외로운 흐름에/어릴 적이 되살아!
이택극님의 시조다. 나도 반딧불을 생각하면 소년시절이 생각난다. 발광기에서 나오는 인광을 반짝거리며 여름밤 물가의 풀밭 위를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반딧불이야말로 더 없는 여름밤의 서정을 자아내게 하는 밤의 전령들이었다. 우리는 저녁만 먹으면 봇도랑으로 나가 반딧불 잡기에 여념이 없었다. 풋고추들인 우리들만의 놀이가 심심할 때에는 옆집의 순이도 영이도 불러내 마냥 쏘다니며 병에다 잡아넣고선 반딧불을 꺼내어 순이의 이마에도 영이의 이마에도 붙여 주며 좋아라 웃어댔다. 지그시 눈감은 두 볼에다 연지를 찍듯 붙여도 주고, 콧등에다 등불을 매달 듯 달아 주며 내 색시인양 바라보던 천진난만한 시절이었다.
그런 어느날 밤이었다. 우리는 들판의 한복판으로 흐르는 냇물가로 멀리 원정을 나갔다. 그곳은 저녁을 해먹고 난 후 마을의 처녀들이 하루 종일 흘린 땀을 씻으려고 삼삼오오 몰려 나와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등물을 치거나 멱을 감는 은밀한 즐거움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반딧불을 찾아 나선 우리들은 멀리 몇 점의 불들이 깜박이고 있어 그곳을 향해 살금살금 걸어갔다. 냇물 저쪽에서는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나고 텀벙텀벙 물 헤엄치는 소리도 들렸다.
풋고추들이라 해서 호기심의 발동이 없으란 법은 없다. 아랫도리에서 이상한 힘이 뻗칠 나이는 아니지만 야릇한 흥분을 느끼며 그곳으로 가보았다. 처녀들은 꺄르르 웃어댔다. 아마도 알몸으로 멱을 감는 처녀들이 서로서로 등을 문질러 주다가 어느 민감한 부위에 손이 닿았는지 자지러지듯 웃어댔다. 금단의 지역을 염탐하는 꼬마 기사처럼 더욱 가까이 접근해 가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가까이 가보니 멀리서 깜박이던 불빛이 반딧불이 아니라 담뱃불들이 아닌가. 먼발치에서나마 멱감는 처녀들의 알몸을 훔쳐보려고 미리부터 은밀히 숨어든 동리의 총각들이 담배를 뻐금대고 있었다. 숫내를 피울만한 총각들이 달아오르는 그 숫기를 못 참아 차마 불한당처럼 달려들지는 못 하고 담배로서 삭임질을 하고 있었다 고나 할까.
우리에게 돌아가라는 신호를 재촉하듯 보내왔다. 훔쳐보기가 심히 부끄럽기도 했겠지만, 자기들만의 그 행복한 순간을 더 만끽하고 싶었을 테니까. 우리들은 도둑고양이 앞의 생쥐처럼 슬금슬금 뒤로 피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생각해 보았다. 처녀들의 물기 머금은 허어연 살결이 달빛을 받아 번들거릴 때 그들은 그 얼마나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한숨을 내쉬었을까 싶었다.
그후 우리들의 풋고추도 차츰 약이 올라갈 때쯤 되자 여름밤이면 그곳을 찾아가 총각들의 그 훔쳐보기 흉내를 내보곤 했다. 짜릿한 충동이었다.
사람들에게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훔쳐보기의 본능적 충동이 있나 보다. 김홍도의 풍속화 ‘빨래터’란 그림을 보면 허벅지를 내놓고 앉아서 빨래하는 여인과 감은 머리를 빗질하고 있는 여인 등 네명의 여인이 있고 점잖은 양반인 듯한 사람이 부채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는 도둑고양이처럼 그 장면을 엿보고 있다. 그리고 신윤복의 풍속화 ‘단오풍정(端午風情)’에는 여인들이 젖가슴을 내놓고 머리를 감거나 세수를 하는 장면을 두 소년이 생쥐처럼 엿보고 있다.
그러고 보면 소년 시절의 나도 목욕터의 피핑 탐(Peeping Tom,훔쳐보는 아이)이었나 보다. 옷을 숨기는 짓궂음은 없었으니 우량급(?)이었다고나 할까. 우리의 설화 <선녀와 나뭇꾼>에 나오는 나무꾼이나 인도의 세계적 그림 ‘목욕하는 목녀들의 옷을 훔친 크리슈나’와 같은 용기(?)도 없이 그저 호기심 많은 ‘훔쳐보는 아이’였을 뿐이었다.
(1990)
<진달래꽃의 사연>
내 고향의 봄은 먼 논벌에서부터 왔다. 바다에 면한 어촌이 아니라 오로지 농사에만 의존하던 시골이라 산바람과 함께 가난한 마을에도 해마다 봄은 찾아왔다.
논벌에서 고동을 주워먹으려고 끼룩거리며 찾아들던 두루미나 황새 떼들이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면 서서히 봄은 찾아오는 것이었다.
논두렁에는 쑥이 파랗게 돋아나고 들에는 냉이, 소루쟁이, 씀바귀, 질경이, 달래, 비름이 돋아나면 댕기머리를 한 처녀들은 봄 아지랑이의 유혹에 못이긴 듯 나물 캐러 간다고 들로 산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내 또래의 어린 조무래기 소년들도 이에 뒤질세라 삼삼오오 떼를 지어 들로 산으로 봄맞이를 나갔다.
벌써 40년이 훨씬 지난 옛 시절의 이야기이다. 먹을 것이 귀한 시절이라 우리들은 봄의 미각을 입안에 주워 담거나 봄을 따먹으러 열심히 들로 산으로 헤메어 다녔던 것이다. 일종의 군것질 사냥(?)인 셈이다.
들판에 나가 양지 바른 쪽의 흙 속을 파헤치면 국수발 같이 생긴 하얀 ‘메’가 쏟아져 나온다. ‘메’란 메꽃의 뿌리인데 식용이나 약용으로 쓰인 만큼 우리들에게는 근사한 사냥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머슴들이 무논바닥을 쟁기로 갈아 누일 때면 바싹 그 뒤를 따라다니면서 무슨 큰 보물이라도 줍듯 올무를 주워 먹어대곤 했으며 논두렁에 돋아난 삐러기를 뽑아 먹기도 했다. 이런 일에 지치면 뒷동산으로 올라가서는 찔레순을 꺾어 껍질을 벗겨 먹거나 소나무 가지를 꺾어 송기를 해먹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것보다 더욱 강한 인상으로 나의 뇌리에 남아 있는 추억은 꽃 따먹기의 습속이었다
바람과 하늘을 보며 자란 천진한 소년들은 봄이면 뒷동산에 올라 울긋불긋 교태를 부리는 진달래꽃을 찾아 꽃 따먹기에 더 없는 매력을 느꼈다. 개꽃이다 참꽃이다 하여 참꽃 찾기에 여념이 없었고 해거름이 되어서야 비로소 소년들은 진달래꽃(참꽃)의 시큼한 미각을 한입 가득히 느끼며 흙투성이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리고는 왜 사람들이 같은 진달래과에 속하는데도 참꽃보다 더 아름다운 철쭉꽃을 ‘개꽃’이라 이름하는가에 의문을 품은 채 그대로 잠들기도 했다.
꽃을 먹는 소년. 이제서야 나는 그 추억의 비밀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가난했던 지난 시절, 어른들은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참’과 ‘개’란 접두어로 구별했던 모양이다. 개비름이 그렇고 개고사리, 개머루, 개쑥갓이 모두 그렇지 않은가. 꽃의 아름다움이 판단의 기준이 아니라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진달래과의 꽃도 ‘참꽃’과 ‘개꽃’으로 구별된 것이다. 그래서 아름다운 ‘개꽃’은 일부러 피해가며 열심히 ‘참꽃’을 찾아 헤맨 것이다.
넉넉한 환경 속의 외국 아이들이 초콜릿과 케이크로 위를 즐겁게 해주고 있을 때, 그리고 형편이 좋은 도시의 아이들이 비가와 구슬사탕으로 입안의 침샘을 자극시켜 주고 있을 때, 보릿고개의 한숨소리를 들어온 시골의 가난한 아이들은 꽃을 따먹으면서 허기진 위의 무게를 가늠하려 했던 게 아닐까.
그렇다. 꽃이나 풀을 보면 항상 먹는 것을 연상했던 가난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아니었던가. ‘개구리밥’ ‘꿩의 밥’ ‘떡버들’ ‘떡쑥’ ‘떡진달래’ ‘며느리밥풀꽃’ ‘바위떡풀’ ‘국수버섯’ ‘국수나무’ 란 이름에는 서러운 훈장처럼 떡, 국수, 밥 등이 자주 등장하지 않았던가.
이런 서글픈 환경 속에서 자라난 시골의 아이들도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봄이면 꽃을 꽃으로서가 아니라 먹을 것으로 생각하여 꽃 따먹기의 그 슬픈 습속을 배워 온 게 아닐까. 초근목피의 역사에 비하면 꽃 따먹기의 습속은 그래도 낭만(?)이라도 있다고 말하면 지나친 감상일까.
이제 세상은 너무도 많이 변했다 부모들의 영양과다 보호로 아이들이 뒤룩뒤룩 살이 쪄가고 집집마다 냉장고에는 먹을 것이 차곡차곡 채워져 비명을 지르고 있는 세상이 아닌가. 어디 그뿐이랴. 어른들 사회에서는 과소비가 문제라고 연일 신문에 대서특필되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잠시 떠올려본 나의 꽃 따먹기 추억은 어쩌면 먼 옛날의 전설 같기만 하다.
내 고향 뒷동산에서는 아직도 철없는 아이들이 봄이면 꽃 따먹기의 놀이를 하고 있을까? 봄이 오면 봄바람에 그 소식부터 물어 보련다.
(1990)
<내 고향, 하동 옥종>
무더운 여름이면 나는 여름을 쫓듯 울어대는 고향의 매미소리를 연상해 보곤 한다. 솔바람처럼 나의 귓가를 스치는 ‘지이지이이’ 왕매미소리, ‘쌔에롱 쌔에롱’ 참매미소리, ‘시옷시옷’ 무당매미소리, ‘맴맴맴’ 말매미소리가 잠시 더위마저 잊게 한다.
눈을 감으면 어느 결에 나는 고향 마을의 숲속을 뛰어 다니는 천진한 아이가 된다. ‘시옷시옷’하는 무당매미소리에 맞추어서는 짓궂게도 그 사랑의 호소를 방해라도 하듯 큰소리로 ‘순이 요오시 순이 요오시’(‘요오시’는 ‘좋아’란 뜻의 일본말)를 외쳐 보기도 했고, 또 맘 논을 맬 즈음인 늦여름에 ‘맴맴맴’하고 울어대는 말매미소리를 반주 삼아서는 그늘 밑에서 달콤한 졸음에 취한 채 게으름만 피우는 머슴을 재촉하듯 ‘맘 논 매어라 맘 논 매어라’를 후렴처럼 외쳐대기도 했다.
아무튼 내가 이 정도라도 매미소리 타령을 읊을 수 있는 것도 내가 시골 출신인 덕택이다.
나의 고향은 군으로 말한다면 경남 하동군이다. 그 어느 지역보다 풍광이 아름답고 산수가 수려하며 경관이 빼어나다. 그래서 많은 노래의 배경이 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하동포구 80리」,「상사의 내 하동」,「섬진강 탄곡」,「돌아가자 하동포구」,「하동포구 아가씨」,「물레방아 도는데」,「그리운 하동포구」,「섬진강 처녀」,「삼백 리 한려 수도」,「추억의 하동포구」,「화개장터」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많고도 많다.
이런 자연조건을 갖춘 이 고장의 옥종면(玉宗面)이 바로 나의 고향이다. 나의 숨결이 숨어 있고 나의 발자취가 묻어 있는 이곳은 황금어장을 잉태하고 있는 어촌도 아니고, 무나 배추가 풍성한 넓은 들녘을 베고 누운 곳도 아니며, 그렇다고 오지(奧地)나 다름없는 심심산골도 아니고, 외지의 뜨내기들이 왁자지껄 모여드는 광산촌도 아니다. 그저 평범한 산골의 작은 면일 따름이다.
진주에서 버스로 약 한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하동군의 북부에 위치한 면인데, 작가 이병주 선생의 고향인 북천면과는 바로 이웃하고 있다. 지리산에서 발원하는 덕천강이 진양군의 수곡면과 면계를 이루며 유유히 흐르고, 산청군과도 군계를 이루고 있다.
교통의 편리를 보아 하동읍 보다는 진주와 내왕이 많은 곳이고, 또 지리산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라서 지리산 공비 토벌 직전까지만 해도 밤손님(빨치산)들의 성가신 내방(?)을 받아 종종 곤욕을 치른 곳이기도 하다.
면내에서 자랑할 만한 곳으로는 우선 종화리(宗和里)라는 마을을 들 수 있다. 백로의 도래지로 지정,보호되는 곳인데, 제철을 만나면 부근의 소나무 숲은 일대 장관을 이룬다.
정수리(正水里)라는 마을은 세계적으로 품질 좋기로 이름난 고령토 산지이고 영당부락에는 옥산서원(玉山書院)이 있다. 포은 정몽주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곳인데, 춘추로 향례를 봉행하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 집안에서 관리하고 있는 연고로 따라가 함께 공부하고 잠을 자본 적도 있다.
면 소재지 청룡리(靑龍里)의 한복판에는 천연기념수로 보호되고 있는 몇 백년 묵은 은행나무가 있다.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을 선사해 지붕 없는 야외사랑방 구실을 해주는 곳인데, 고향 어른들은 외지로 나간 아들과 손자 녀석의 이야기로 꽃을 피우기도 하고, 열띤 시국담을 주고 받기도 한다.
내가 자란 양구리(良邱里)라는 마을을 보면, 뒤쪽에는 엄마의 품속처럼 자애로운 옥산봉(玉山峰)이 우뚝 솟아 있고, 그 품안에는 장수바위를 안고 있다. 이 바위에는 전설이 서려 있다. 아스라한 옛날에 전쟁이 일어나자 한 장수가 적을 쫓아 말을 타고 이 바위 위를 지났는데, 그 말발굽의 흔적이 남아 장수바위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소 먹이던 시절, 이 바위 위에 올라가 말을 모는 전설 속의 장수 마냥 흉내를 내며 기개와 담력을 키우던 기억이 새롭기만 하다.
그리고 이 산의 발치에는 일제시대부터 고령토를 파냈던 백토간 폐광이 여기저기 흰 이를 드러내고 있는데, 어린 시절 백토간의 철구루마 타기는 정말 신나는 놀이 중의 하나였다.
마을의 들머리에는 잘록 떨어져 나온 듯한 묏봉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는 하한정(夏寒亭)이란 정자가 있다. 양(梁), 이(李), 최(崔), 백(白), 정(鄭), 하(河)의 육성이 협력하여 지은 정자다. 이름 그대로 여름철에도 한기를 느낄 만큼 시원한 곳이다. 하한정이란 현판의 글씨를 대원군이 내려 주었다는 이야기를 어릴 적부터 들어왔는데, 어느새 손을 타 감쪽같이 없어졌다는 소식이다. 철이 들어 진주로 유학(진주 중․고등학교)을 나온 나는 여름방학이면 마을 친구들과 그곳에서 수박서리, 닭서리를 음모하기도 했다.
북방리(北芳里)에는 고승산(孤僧山) 일명 고승당산이 있는데 들판에 혹처럼 우뚝 솟은 해발 185m의 야산이다. 거기에는 고승산성이 있는데 옛날부터 있었던 성으로 100년 전(1894년 11월)이곳에 집결한 동학농민군 2천여 명이 신식무기를 갖춘 왜병에게 대패했다는 비운(悲運)의 기록이 남아 있는 곳이다.
옛부터 그때 죽은 넋들이 바람이 불면 ‘고시랑 고시랑’거리는 소리로 울부짖는다 해서 일명 ‘고시랑당’이라고도 불려져 내려오고 있다.
초등학교시절, 그곳으로 원족(소풍)을 가 지난 역사를 귀담아 들으며 불의에 대한 저항의 힘을 키워보기도 했다.
큰 벼슬이 나온 마을로는 대곡리(大谷里) 삼장(三壯)골이 있다. 조선 성종 때 이 마을에 조지서(趙之瑞)라는 인물이 태어났는데, 그는 처음에 생원에 합격하고 나서 뒤이어 진사에 장원, 또 그 해 문과에도 장원급제했으며, 후에 중시(重試)에도 장원을 했다. 그런 연고로 한 사람이 세 번이나 장원했다는 뜻에서 삼장골이라 불려져 왔다.
그는 연산군이 세자일 때 시강원보덕(侍講院報德)으로 연산군의 태만을 직간하여 권학에 힘쓰라고 직소하다가 미움을 받았다. 연산군이 보위에 오르자 외직으로 나가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 지리산에 들어가 10여 년 간 독서를 즐기고 있었는데 그만 갑자사화에 휘말려 맷돌로 갈아 죽이는 참형을 당했다. 부인 정(鄭)씨가 한강에 버려진 시신을 수습하여 이곳 삼장골의 선산하에 묻어 주었다. 부인은 그곳에 집을 지어 묘를 지키며 한 많은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가 중종반정이후 신원되어 개장의 명이 나서 훌륭하게 다시 장사를 치르고, 동시에 그 뜻을 기리어 나라에서 열녀문을 세워 주었는데 지금도 남아 있어 면민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고 있다.
또 이 대곡리에 또 하나의 열녀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도 있다. 이웃 마을 추동 부락옆 길 위쪽에는 ‘정조(貞操)’라는 한자가 조각되어 있는 바위가 있다. 옛날 이 마을에 사는 한 미천한 여인이 도적 떼들에게 붙들려 성추행을 당할 뻔했다. 죽기를 작정하고 반항해서 풀려 나온 그녀는 슬피 울면서 집으로 돌아와 유방이 도둑들에게 더럽혀졌다 해서 칼로 도려내고 자기의 정조를 지켰음을 만족히 여기고 죽었다.
뒷날 이 여인의 행동이 귀감이 된다고 지방주민들이 뜻을 모아 바위에 글을 새겨 주었고 또 나라에서도 정문을 세워주게 되자 이곳을 ‘정문거리’라고 부르게 된 내력이 있다.
그리고 효자가 난 마을로는 월횡리라는 마을이 있다. 조선 단종조 생육신의 한 사람인 조여(趙旅)선생의 후손인 함안 조씨가 250여 년 전부터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던 곳이다.
이 마을 앞에는 조그마한 나루가 있고 나루의 우측 300m쯤 되는 곳에 ‘효자도(孝子渡)’라고 한자로 새긴 큰 바위가 있다.
이 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얽혀 있다.
옛날 이 마을에 부모에 대한 효성이 너무나 지극한 조씨 집안의 한 선비가 있었다. 부모가 돌아가시자 묘 앞에 움막을 지어 6년이나 시묘(侍墓)를 하였는데 마침 묘소와 집을 오가는 길에 시내가 있어 겨울이건 여름이건 늘 물을 건너 다녀야 했다. 그 효성에 감복한 사람들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돌을 쌓아 나루를 놓아주었고 또 그 효성을 기리기 위해 그 나루를 ‘효자나루’라 부르며 바위에다 그 이름을 새겨 넣었던 것이다.
열녀와 효자가 밥에 미처럼 귀하고 귀한 요즘 같은 세상에는 이런 이야기들은 하나의 반성적 귀감이 된다 고나 할까.
생각해 보면 내 고향 옥종면은 비록 국가적인 큰 자랑거리는 없다 할지라도 오랜 역사가 숨쉬는 곳이다. 옥산봉에는 마제석기가 나오기도 했고, 문암(文岩)이라는 곳에는 상당수의 고인돌이 길가나 논바닥에 믿음직스런 허리를 드러내놓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사람을 두고 말해 보면, 큰 인물이 나오지 않은 대신 큰 역적도 나오지 않은 곳이라 그런 나름으로 자위를 하고 있다.
그렇지만 지금 고향 사람들은 옥산(玉山)을 바라보면서 옥(玉)처럼 빛나는 인물이, 또 청룡리 뒷산을 바라보면서도 승천하는 청룡(靑龍)과 같은 인물이, 그리고 장수바위의 전설을 생각하면서 는 전설 속의 장수 같은 인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서운해하고 있다지만, 언젠가는 그런 인물이 나오리라 기대하며 오늘을 열심히 사는 길이 오로지 그 기대를 앞당길 수 있는 지름길이 아닐까 싶다.
아니, 달리 생각해 보면 내 고향을 꿋꿋이 지키고 가꾸는 사람들이 바로 미국 작가 나사니엘 호돈의 단편소설 〈큰바위 얼굴〉의 주인공처럼 진정한 옥(玉)이요, 청룡(靑龍)같은 인물들이라고 느껴진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쌀 개방이란 우루과이 라운드의 거센 펀치를 받아 정신도 잃고 또 그 아픔도 이만저만이 아닐 성싶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그들에게 이렇다 할 도움과 위안을 줄 수 없는 것이 나의 처지지만 내가 직접 작사해 본 ‘옥종면가’의 노랫말에 곡이나 붙여 선물해 볼 생각이다.
1.지리산 정기 받아 옥산봉 솟고/ 덕천강수 넘실대는 내고장 옥종
솔바람 댓닢소리 풀피리 소리/ 선인들 큰뜻 서려 우리를 지키네
마음곱고 인심좋은 이 터전에서/ 우리는 힘차게 오늘을 산다.
2.지리산 정기 받아 사림봉 솟고/ 월횡강수 노래하는 내고장 옥종
넓은 들 황금벌판 웃음꽃 피네/ 백토가 지천인 유서깊은 이 터전
대문열고 마음열고 큰 뜻도 세워/ 우리는 정답게 내일을 연다.
끝으로 나의 고향 사람들이 하루 속히 우루과이 라운드의 홍역에서 벗어나 위의 노랫말처럼 힘차게 오늘을 살고 정답게 내일을 열어가며 넓은 들 황금벌판에도 웃음꽃이 활짝 피기를 기원한다.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