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地위에 土地를 세우자」
김 행남
젊어서 읽은 좋은 책 한 권이 사람의 일생을 좌우하기도 한다 했다.
지금의 나는 이순을 넘긴 나이에 부끄러운 말인지 몰라도 어떻게 살아왔고, 무엇이 되어있는가는 별스런 의미도 없고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남들보다 훨씬 먼저 (그 시대의 상황에서는) 책 속에 흠뻑 빠져들어 독서 취미를 깊이 심고 다져갔다.
그 같은 습관을 지금껏 이어오고 있으니 다행으로 여기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아주 어렵게 살던 젊은 시절의 상당 기간 스스로에게 묻고 대답해 본적이 여러 번 있었다. ‘생활이 여유로워진다면 중년 이후의 삶은 어떤 것이 가장 바람직한가?’ 서슴없이 대답하기를…… ‘경제와 건강이 허용하는 한 마음껏 책을 읽고 싶다’고……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초등학교 시절 우연히 접하게 되었던 단행본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나를 독서광으로 만들었다. 누렇게 빛바래고 표지가 너덜거리던 볼품없는 그 책 한 권이 소년의 꿈을 두둥실 띄워주고 오만과 허세로 포장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십대에 읽은 「월탄 삼국지」를 지나 「천세욱」「정비석」「방기환」「이문열 삼국지」까지 이어지며 나름의 속독법을 개발하게 되었고 상당 수준의 이야기꾼이 되어버렸다. 여기에, 실 가는데 바늘이라고 「수호지」까지 구색 맞춤이 더해져 비릿했던 소년기의 감수성으로 받아들인 임기응변과 재치가 발라졌고, 차츰 자라가면서는 용기와 의리, 사랑과 권모술수도 대강은 알게 되었다. 하여튼 그것들은 독서꾼의 기초 훈련용이었다지만 오십 년이 흐른 지금까지 즐겨 읽고 있는 책이다.
재미로 시작해 취미의 차원으로 정착해 가던 무렵, 나를 크게 변화 시켜준 책이 「박경리의 토지」였다. 1970년 결혼한 이듬해 서울의 변두리 버려진 땅에 살며 호롱불 밑에서 배고픔만큼이나 서러운 독서를 이어가던 무렵이었다. 예비군 동료가 가지고 나왔던 「월간 현대 문학」을 억지로 빌려 온 것이었는데 제1부의 연재 2회가 실려 있었다. 이어서 어렵사리 1회분을 헌 책방에서 구입하게 되었고, 작가의 와병으로 연재가 중단 될 때까지 빠짐없이 구독 했었다.
무겁고 우중충한 귀기와 불륜, 순수한 사랑, 섬세한 토속적 표현기법에 투박하며 정감 있는 언어들이며, 자연 배경의 묘사와 잘 맞아 떨어진 갖가지 삶의 모습들은 나를 들뜬 광대처럼 변화 시켜갔다.
작가의 오랜 와병으로 연재가 중단 되었던 몇 년은 너무도 답답하고 허망한 세월이었다. 어쩌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위대한 작가를 잃을지 모른다는 경박하고 재수 없는 상상으로 안타까움이 길게 이어 졌다.
만난을 무릅쓴 투병 생활에서 강인한 의지로 다시 우뚝 일어선 작가는 더욱 힘차게 쓰기 시작했다. 「월간 문학 사상」을 통해서였다. 그리고 드디어 집필을 시작한지 스물여섯 해 만에 전5부 16권의 완간을 보게 된 쾌거가 이루어졌다.
장하다! 훌륭하다는 표현과 찬사로 미물이나 다름없는 우리가 부끄러운 치하를 어찌 대신할 수 있겠는가?
집필을 시작하면서부터 아마도 작가는 자기 자신이 자기의 것이 아니라는 거룩한 공인의 사명 의식을 버리지 않았을 것으로 믿어진다. 다행스럽게 작가는 이후로 강원도 산골 마을에서 흙을 메만지고 산하를 벗하며 건강하고 여유로운 삶을 즐기고 있다니 참으로 기쁜 일이다.
자유, 민주를 쟁취한 듯한 뿌듯한 감격이 이만했을까?
완간본 전집 16권을 사들여 침식을 잊다시피 처음 완독한 기간이 스무날이나 걸렸을까?
다시 읽고 오로지 또 다시 읽기를 대여섯 번 되풀이 했더니 이곳저곳이 직접 다녀온 곳처럼 변함없이 떠오르고 사람마다 내가 만나본 것처럼 얼굴 모습부터 행동거지며 말씨에 이르기까지 상세히 각인 되어 버렸다. 허망한 바람이겠지만 이 작품을 영상화 하는데 배역 캐스팅 의뢰를 받는다면 크게 일조를 할 만한 자신이 없는바 아니다. 과거의 나는 일기라든가 변변한 독후감 한 번 써본 적이 없었다. 그저 심심파적으로 장난삼아 끄적거려 본 낙서를 벽에 붙여 놓고 친구들과 낄낄대기 고작이던 내가 읽는 문학에서 즐기며 써보고자 하는 탐구 문학으로 빠져들게 된 것은 「박경리」선생 탓이며 「토지」가 책임져야 할 문제다. 그것도 한심스럽게 쉰셋의 나이였으니 가소로운 일이 아닐 수 없으며 남들의 지탄을 받는다 해도 할 말이 없다. 선생의 작품을 위대하다 하는 것은, 평사리의 최참판댁 주변에서 시작되는 꾸며낸 이야기가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은 시대・장소의 배경이나 연결, 지속성들이 반세기 동안의 실제 역사에 절대적으로 밀착하여 분명한 사실처럼 보여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불과 오십 년의 세월을 섬진강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반도의 곳곳을 누비다가 간도 땅으로 해서 러시아령에까지 뻗치고, 현해탄을 오가다가 모천으로 다시 돌아오는 진정한 회귀성 향토문학이기 때문에 더욱 애착이 가는 것 아닌가 여겨진다.
울고 싶을 때 뺨 때려 준다더니 요사이 큰 기쁨 두 가지가 더해졌다. 모방송국에서 「토지」를 영상화하여 주말드라마로 내보내고 있다. 방영 시간마저 알짜배기 황금시간대로 설정했으니 가히 시청률을 짐작할 만하다.
「토지」를 사랑하는 많은 독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아직껏 그토록 커다란 문학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얼마나 기쁘고 다행한 일인가?
며칠 전 주말, 하동 청소년 수련원에서 영호남 문인들의 정례 모임인 PEN클럽 교류가 있었다.
해박하고 저명한 양 지역 교수들의 지리산과 섬진강을 배경으로 한 「민족 문학」이 주제였기에, 그 의의가 더욱 크게 빛을 발했다.
둘째 날은 섬진강변의 송림공원을 둘러보았고 이어서 소설 속의 무대에 재현된 「최참판 댁」과 「평사리 문학관」을 방문했다. 해당 관청에서 보내준 문화 해설사의 상세한 소개나 설명이 더해져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기도 했지만 대다수 문학인들은 작품을 읽었겠기에 여기저기서 기탄없는 찬사와 탄식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내 개인적인 입장에서만 보더라도 삼십년 넘은 세월을 두고, 수백 수천 번을 마음속에 그려 넣었던 참판댁의 여기저기 갖가지 모습들, 이 구석, 저 공간들이 어쩌면 그렇게도 내 그림과 딱 맞아 떨어지는지 너무도 흡족했다. 이는 필시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과, 충고를 아끼지 않은 자문이 불세출의 장인과 절묘한 만남을 이룬, 건축예술의 백미라 칭찬하고 싶은데 모두들 동의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소설의 이야기가 시작된, 살아있는 역사의 공간에서 이제 「토지」는 또 다른 부활을 시작하고 있으며, 영상 매체를 통하여 이 땅의 문학인은 물론이고 모든 겨레들, 재외의 동포와 외국인들까지 「토지」를 읽거나 보지 않고는 문학, 예술을 말하지 말라는 절실한 홍보가 이뤄지기를 기대해본다.
삼국지를 열심히 읽은 덕에 대입시험 논술 과목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던 오래전의 S대 수석합격생이 있었다. 덕분에 작가는 몇 해 지나지 않아서 이나라 최초, 최고의 문인 재벌이 되었다. 이처럼 놀라운 문학의 위대성을 간과하지 말고 우리는 「토지」를 더욱 사랑하고 연구하며 홍보하는데 게으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나는 지금 상당히 초조하다. 삼년쯤일까? 십년이 더 걸릴까? 이 나라의 위상이 일본이나 중국과 다투어 키 재기를 하는 날이 된다면 선생의 「토지」는 펄 벅의 「대지」를 누르고 우뚝 설 것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날! 그날까지 반드시 건강한 모습으로 살아계셔서 우러러 바라 뵙는 우리들에게 조용한 미소를 보내주실 것을 기대하는 기쁨으로 문학 활동에 정진하고자 한다.
하동 고을은 갖가지 튀는 브랜드와 숨 쉬는 테마를 가진 아름다운 고장, 관광의 명소이다. 여기에 박경리 선생의 선택을 받은 땅이니 얼마나 커다란 축복인가?
PEN클럽 행사에 하동군에서는 문화유적 해설사를 보내주었고 지리산 명품 「화개 녹차」를 한 아름씩 안겨주었다. 여독을 푸는데 큰 도움이 되었던 훌륭한 오찬 대접에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더불어, 우리를 위해 온몸을 던져 수고를 아끼지 않으신 문화 유적 해설사 「김경연」님에게 사례 말씀 전하고 싶다.
지리산과 섬진강, 토지문학의 경외로운 신비에 당신의 아름다움까지 얹어 새겨 우리 모두는 오래도록 이곳을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