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 장날
하지(夏至)를 하루 지난 하동(河東) 장날. 모내기도 끝났고 밭일에도 비켜서 숨돌릴 즈음이니 농사일에서 벗어나 조금은 한가할 듯해서 큰장이 설 것으로 여겨졌다. 이런 계절적인 연유로 인해서 장 구경도 하고 무뎌진 호미나 낫 같은 연장을 대장간에 가서 벼리고, 재 너머에 사는 일가친척의 소식도 들을 겸해서 군청(郡廳) 소재지의 장터에 사람이 몰려올 것으로 예상하고 찾아갔는데 기대와는 한참 동떨어진 상황이었다.
마산에서 이른 아침에 출발하여 하동 장터에 도착하니 대략 오전 열 시경이지만 올 들어 가장 더운 날씨의 뙤약볕은 견디기 어려울 만큼 강렬했다. 아주 오랜만에 찾은 오일장(五日場)은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장터 입구부터 옹기종기 펼쳐진 난전(亂廛)의 모습은 어린 시절 어머니 치마 자락을 붙들고 따라다니던 장터의 추억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내 머리에서 회상되는 옛과 지금의 모습은 적어도 반 백년의 시차가 있으며 무언가 달라 보였다. 아련한 그 시절의 장터 모습을 애써 더듬어 본다. 내가 추억하는 장터는 지금 눈앞에 펼쳐진 것보다는 작았고, 사고 팔 물건의 종류나 량이 훨씬 적었으며 초라하고 볼품 없었다. 그러나 장터를 누비는 사람은 훨씬 많고 왁자지껄했던 것으로 기억되었으나, 모두가 초췌한 몰골을 하고 궁기(窮氣)가 줄줄 흘렀던 것 같았다. 그 옛날에 거개(擧皆)의 장꾼들 옷은 흰 광목으로 만들어 허름하기 짝이 없는 바지저고리나 치마가 대부분이었는데, 눈앞에 오가는 그들은 지난날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색상의 세련된 의상들이었다. 또한 내 뇌리에 각인된 장터에는 사고 팔 물건을 남정네들은 지게에 지고, 여인네들은 머리에 이고 몇 십리 고갯길과 먼지가 뽀얗게 일어나는 신작로를 비지땀을 흘리면서 걸으며 발 품을 팔지 않았던가. 하지만 오늘의 그들은 개인 차량이나 버스 혹은 오토바이로 여유 만만한 모습으로 장으로 나와 신선 같은 모습이었다.
불과 한 사람이 비좁게 자리할 빈터에 옹색하게 자리잡은 난전에는 그 옛날 장터에서 봤던 것과 별반 차이가 없는 물건들이 손님을 기다리며 땡볕에 졸고 있었다. 한 바퀴 휘휘 돌아보니 농산물은 매실과 마늘이 두드러지게 많이 나와 있었고 푸성귀는 열무와 이런 저런 채소가 구색을 맞추고 있었다. 또한 해산물은 바닷조개가 특히 눈길을 끌었으며 갈치와 고등어가 싱싱해 보이기도 했다. 또한 난전에 한약재, 싸구려 옷, 신발과 슬리퍼와 고무줄, 이불, 모자 종류, 농산물을 펼쳐 놓은 곳이 얼마나 많던지, 장을 보러 나온 장꾼보다 장사꾼이 월등하게 많아 자칫하면 마수걸이도 못하고 파장을 맞는 경우가 있지 않을까 오지랖 넓은 걱정이 들기도 했다.
어딘가에 대장간이 있는가 싶어서 유심히 살펴봐도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만물상 몇 군데를 넘겨다보니 조선 낫, 왜 낫, 괭이, 호미, 도끼 같은 연장과 싸리 삼태기 등을 파는 집에 이끌려 다가가서 주인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다. 또 다른 노점에서는 요즘 찾아보기 어려운 참빗과 얼레빗, 지네, 말린 누에와 번데기 등을 펼쳐 놓았으나 한참을 지켜봐도 찾는 이가 없고 파리만 날렸다. 역시 농촌을 끼고 서는 장이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 중에 하나가 강아지, 새끼 고양이, 닭과 오골계, 칠면조와 오리 몇 마리로 좌판을 벌린 노점이 단연 인기를 끌며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가장 번듯한 싸전 몇 군데를 유심히 살펴봤다. 쌀과 보리쌀 그리고 여러 가지 잡곡 그릇 위에 꽂혀 있는 팻말에 관심이 쏠렸다. 거기에는 ‘한국산’, ‘중국산’, ‘인도산’ 같이 산지를 나타내는 팻말이 꽂혀있었다. 원래 하동지역은 농업이 중심인 지방이기 때문에 그들 싸전에는 당연히 ‘한국산’이라는 팻말이 대부분일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꿈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전형적인 농촌지역의 군청 소재지 싸전에 진열된 곡식 위에 꽂혀 있는 팻말마저도 되레 ‘중국산’, ‘인도산’ 등이 많은 상황에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 헛기침만 해댔다.
장터 전체를 샅샅이 둘러보면서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분명히 장날인데도, ‘하동공설시장’이라고 커다란 간판이 붙어 있는 안쪽의 어두컴컴한 곳으로 발을 들여놓았더니, 가게 주인들 외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심하게 표시하면 그 간판부터 공설시장 안쪽은 출입금지라도 시킨 것 같이 내왕하는 사람의 발길이 뜸했다. 그런 의문이 풀리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 공설시장을 벗어나 또 다른 골목에 펼쳐진 난전을 어정거리고 있을 지음 어깨띠를 두른 한 무리의 여인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무엇인가 열심히 얘기하면서 전단지를 건네 주며 공설시장을 많이 활용해 달라는 당부를 했다. 어깨띠에는 ‘재래시장 활성화 캠페인’이라고 써 있었다. 한 옆으로 비켜서서 네 쪽으로 만든 전단지를 펼쳤더니 그 날(6월 22일)부터 캠페인을 펼치기 시작하는 것이며, 이런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하동 군민(郡民)들의 생활 필수품 구입실태를 조사 분석한 바에 의하면 ‘재래시장 이용율은 24.1%’ 정도라고 했다. 그래서 지역경제를 살리고 영세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하동군청과 여성단체협의회가 ‘재래시장 활성화 캠페인’을 벌린다면서, 하동 군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군민들에게 간곡하게 호소하고 있었다.
재래시장은
우리 조상들의 삶과 애환이
남아 있는 곳입니다
산나물과 약초를 뜯어 소금을 사고
달걀 꾸러미를 들고나와
생선을 사던 곳입니다
막걸리 잔을 나누며
산 너머 시집간 딸 소식을 물어보며
애비의 사랑을 몰래 전해주던 곳입니다
재래시장에 오시면 넉넉한 시골 인심과
포장되지 않은 삶의 향기가
보따리에 싱싱한 채로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찾아 주십시오
어쩌면 스산하기 짝이 없는 공설시장 안쪽의 국밥 집을 찾아 들었다. 너무도 쓸쓸하여 동행했던 동료 K와 H교수도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허전했던 심사를 애써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때 이른 낮술을 들며 석양(夕陽)같은 장터의 애잔한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가슴이 아릿해 옴은 왜인지 심란하기만 했다. 이제 이 나라 어디를 가더라도 오일장이나 재래시장은 현대화된 백화점이나 대형 할인 마트, 홈쇼핑이나 전자상거래로 인해서 심하게 위축되어 사라질 위기에 처한 현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기에는 어머니 마음 같이 넉넉한 인정을 사고 파는 서민들의 정서와 애환이 명백히 살아 숨쉬고 있다. 따라서 이런 문화를 오늘의 코드에 맞게 개선하여 존속시킬 묘안과 지혜를 찾으려는 길을 모색하는 고민은 진정 무의미한 짓일까.
2005년 6월 23일 목요일
(* 이 글은 "문학저널"의 홈페이지 http://www.mhjc.co.kr의 "산문작가방"에 2005년 6월 28일 게재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