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계사의 창건위치는 어느 곳일까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208번지에는 의상대사(義湘大師:625∼702)에게서 구족계를 받은 삼법화상(三法和尙:?∼739)이 성덕왕 22년(723)에 난야(蘭若, 절)한 금당(金堂)이 있고, 진감선사 혜소(眞鑑禪師 慧昭:774∼850)가 흥덕왕 5년(830)에 창건한 쌍계사(雙磎寺, 玉泉寺를 886년에 개칭)가 있다. 이들 법당은 같은 경내에 있지만 금당은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본당은 낮은 지대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모두를 쌍계사라고 칭한다.
그리고 정강왕은 최치원(崔致遠:857∼?)에게 "선사께서는 행적으로 이름이 들어 났고, 너는 문장으로 벼슬길에 나섰으니, 마땅히 명(銘)을 짓도록 하라"는 명에 의하여 진감선사대공령탑명(大空靈塔銘)을 찬하고 이를 진성왕 1년(887)에 세웠는데, 이것이 국보 제47호로 전하는 진감선사대공탑비이다.
그런데 이 비문에 의하면, 진감선사 혜소는 당나라에서 고행(苦行)을 닦다가 흥덕왕 5년(830)에 귀국하여 강주(康州, 晉州) 지리산 화개곡(花開谷)에 와서
"옛 삼법화상(三法和尙)이 난야(蘭若, 절)한 유기(遺基, 남은 터전)에 당우(堂宇, 절)를 꾸리니 엄연한 절의 모습을 갖추었다."
고 하고,
"홈을 판 대나무를 가로질러 시냇물을 끌어다가 축대를 돌아가며 사방으로 물을 대고는 비로소 절의 이름을 옥천(玉泉)이라고 했다"
고 하였다. 이것이 옥천사(玉泉寺)의 창건유래이다.
한데 앞에서 말한 "유기(遺基, 남은 터전)"란 지금의 금당(金堂)이 있는 고승당(古僧堂) 지역을 말한 것인지, 쌍계사 대웅전이 있는 지역을 말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남은 터전"이란 그 일대의 모두를 말한 것이다. 두 지역은 모두 쌍계사의 경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홈을 판 대나무를 가로질러 사방으로 시냇물을 끌어다가 축대를 돌아가며 물을 대었다"는 말을 음미해 보면, 옥천사의 위치는 금당이 있는 고승당 지역이 아니고, 대웅전이 있는 지역임을 알게 한다. 지형적으로 보더라도 고승당 지역은 지대가 높기 때문에 대나무로 물을 끌어댈 수 있는 지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함에도 1972년에 발행된 『증보 하동군지』의 쌍계사 고승당(古僧堂) 조에서는
고승당은 "신라 문성왕 2년(840, 이 연대는 근거도 없는 것임, 흥덕왕 5년 830년의 오. 필자 주)에 진감선사가 창립하였다. 처음에는 옥천(玉泉)이라고 이름하였더니 헌강왕(정강왕의 오, 필자 주) 시에 쌍계사의 호를 개사(改賜) 받았다. 조선 선조 을미년(乙未年:1595, 인조 18년 1640의 오, 필자 주)에 벽암선사(碧巖禪師)가 본사(本寺)를 중창하고 구위(舊位)를 고승당(古僧堂)이라 칭하였다"
고 하여, 진감선사가 창건한 옥천사가 마치 고승당인 것처럼 왜곡하였다.
이러한 기록이 있은 이후 이 주장을 의식해서인지, 예컨대 『월간조선』 명찰순례 23 「하동 지리산 쌍계사」에서는, 진감선사가 창건한 옥천사는 지금의 "고승당 팔상전(八湘殿) 구역"이라 하고, 지금의 "쌍계사 큰 절과 팔영루 등은 임진왜란 후에 벽암선사(碧巖禪師)가 신축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최근에는 이 고장에서도 이와 비슷한 주장이 더러 보인다.
그러나 그 비명에 의하면 헌강왕이 승하한 후 금상(今上, 정강왕)께서
"절의 문이 두 갈래의 간수(澗水)에 다다라 있다고 복명하므로 이에 쌍계(雙溪)라는 제호를 내리셨다"
고 하였다.
여기에서 말한 "두 갈래의 간수(澗水)"는 불일폭포에서 흘러 쌍계사 양쪽으로 흐르는 두 갈래의 계수(溪水)를 말한 것이다. 이 두 갈래의 물을 쌍계 석간수(雙溪石澗水)라고 한다.
흔히 쌍계(雙溪)를 지리산에서 흘러온 화개천의 본류와 불일폭포에서 흘러온 계수(溪水)를 말하는 경향도 보이고, 이를 "겹 쌍계"라고 말하기도 하나, 어떻든 화개천의 물은 석간수라고 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을 살피더라도 진감선사가 창건한 옥천사의 위치는 고승당 구역이 아니고, 진감선사대공탑비와 대웅전이 있는 구역인 것이다. 비문에서 말한 "두 갈래의 간수(澗水)"는 금당에는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쌍계사(雙磎寺) 조에서는
쌍계사는 "신라 문성왕 2년(840, 이 연대는 근거도 없는 것임, 흥덕왕 5년 830년의 오. 필자 주)에 진감국사 최혜소(崔慧昭)가 당사(當寺)를 창설하고 옥천사(玉泉寺)라고 칭하였으나, 헌강왕(정강왕의 오, 필자 주) 시에 이르러 한 고을에 이사(二寺)가 동명이면 치혹(致惑)할가 염려하여 쌍계의 호를 하사하였으니 이는 문전에 쌍계(雙溪)가 흐름에서 연유함이었다. 학사 최치원으로 하여금 쌍계석문(雙溪石門)의 사자(四字)를 써서 돌에 각하였으며, 조선 선조 을미년(乙未年:1595, 인조 18년 1640의 오. 필자 주)에 벽암선사 김각성(碧巖禪師 金覺性)이 강원(講院)이 협착(狹窄)하여 증설(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중건의 오. 필자 주)하였다"
고 하여, 쌍계사의 역사를 4개소나 왜곡하고 있다.
예컨대 "문성왕 2년(840)"이라는 연호는 쌍계사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이고, 벽암선사(碧巖禪師 覺性:1575∼1660)의 중건 연대도 사실과 다르기 때문이다.
한데 조선조 전기 때의 쌍계사는 상당히 퇴락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쌍계사의 "전우(殿宇, 大雄殿)는 허물어져 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한 전우(殿宇)는 지금의 대웅전을 말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휴정(休靜, 西山大師:1520∼1604)이 명종 4년(1549)에 지은 「쌍계사중창기(雙谿寺重創記)」에서도 확인된다. 여기에 의하면 앞서 9년 전인 중종 35년(1540)에 도사 중섬(道士 仲暹)이 예조(禮曹)에 진감선사대공탑비의 보전을 청하고, 37년(1542)에는 중 혜수(慧修)가 시주를 모아 쌍계사를 중창했다고 하였다. 이에 예조에서는 쌍계사의 사방 5리에 금표(禁標)를 세워 주변의 산림을 보호했다고 하였는데, 여기에도 진감선사대공탑비의 중수, 대전(大殿, 大雄殿)의 중창과 팔영루(八詠樓)의 중수 등을 언급하고 있다. 그 중창기에 이르기를,
"가정 경자년(중종 35년:1540) 봄에 그 산의 도사 중섬(道士 仲暹)이 … 옛 비석(진감선사대공탑비)을 어루만지면서… 중수할 일을 조정에 아뢰었더니, 조정의 대신들이 모두 옳다고 하였다. 그 뒤에 예조(禮曹)가 달려가 사방 5리에 금표(禁標)를 세워 그 안에서 불을 놓거나 나무치는 것을 금하였다.… 팔영루(八詠樓) 3간 지붕을 다시 이고, 비석 앞뒤에는 돌을 쌓아 대를 만들고 물을 끌어 못을 만들었다"
고 하였다. 이어서
"중 혜수(慧修)는 계묘년(중종 37년:1543) 여름에 진감의 옛 절을 보고 개탄하여 중창할 뜻을 세우고, 널리 시주를 모은지 몇 해가 안되어 먼저 대전(大殿, 大雄殿)을 세우고 다음에 금당(金堂)과 동서의 방장(方丈)을 짓고는 낙성의 모임을 열었다. 우뚝한 전각(殿閣, 大雄殿)은 그 모양이 마치 천궁(天宮)과 같았다. 이에 팔영루(八詠樓)의 맑은 바람은 고운의 선골(仙骨)을 다시 깨우치고, 쌍계수(雙溪水)의 밝은 달은 진감의 선등(禪燈)을 다시 밝혔다".
고 하여, 진감선사대공탑비의 중수와 대전(大殿, 大雄殿)의 중창, 팔영루의 중수 등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중종 때의 문신이던 관포 어득강(灌圃 魚得江:1470∼1550)은 명종 초에 쌍계사에 와서 팔영루시병서(八詠樓詩幷序)를 지었고, 남명 조식(南冥 曺植:1501∼1572)은 명종 13년(1558)에 두류산을 유람하고 「유두류록」을 남겼는데, 이의 5월 16일 조에는 팔영루가 언급되어 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조선조 전기 때에도 지금의 쌍계사 대웅전이 있는 구역에는 진감선사대공탑비를 비롯하여 대전(大殿, 大雄殿)과 동서의 방장(方丈), 그리고 팔영루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지금의 쌍계사 큰 절과 팔영루 등은 임진왜란 후에 벽암선사가 신축한 것이라는 주장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진감선사대공탑비는 옥천사를 쌍계사로 개칭한 1년 후인 진성왕 1년(887)에 쌍계사의 경내에 세운 것이다. 만약 옥천사를 금당이 있는 고승당 구역에 세웠고, 지금의 쌍계사는 임진왜란 후에 신축한 것이라면, 절도 없는 숲 속에 대공탑비만을 세웠겠는가. 이는 상식적으로도 명백한 것이다.
다만 벽암선사는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인조 18년(1640)에 중건하였을 뿐 신축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임진왜란 이전에 작성된 휴정(서산대사)의 쌍계사중창기는 아직까지 어느 누구도 언급한 예가 없었다. 이러한 사료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데도 이것을 알지 못한 채 쌍계사를 운운해 온 것이다. 바라건대 나의 이러한 살핌이 쌍계사의 역사 정립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
필자 김범수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한국향토사연구 전국협의회 전문위원
경상남도향토사연구협의회 수석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