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전전우비 앞에 하동전사를 되새기며
하동군재향군인회장 성 금 성
처절했던 전쟁의 뼈아픈 기억이 세월과 함께 잊혀져 가는 오늘에 전쟁의 체험세대와 미체험 세대간의 마음과 인식의 차이도 크게 벌어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대한민국과 하동의 정체성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애국과 애향의 마음 다시 가다듬고 전쟁발발 2개월만에 전국토의 8할이 북한군에 점려당하고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이 절박한 위난에 전선으로 달려간 참전자와 향토를 지킨 한청기동대의 거룩한 희생위에 오늘의 풍요와 민주국가의 기초가된 그 불굴의 충성과 향토애를 후손들의 가슴마다 늘 가득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국군14만 9천명과 유엔군 5만7천명이 전사하고 1천만명의 이산가족과 생산시설 60%가 파괴된 전쟁은 우리하동도 예외일 수 없었다. 전쟁발발 한달만에 북한의 최정예 부대인 제 4.6사단이 호남을 점령하고 북한제6사단장 방호산(方虎山 1953 이중 영웅칭호후숙청됨)부대가 25일 13시경 화개를 점령하고 26일에는 하동읍을 점령한후 부산을 점령하기 위해 파죽지세로 쇄도하든 시기에 하동방어선을 지키기 위해 미제 3대대장 모트(horaid. w. moll). L 중대중 샤라(sharra) 대위 k 중대등과 육본작명 제 70호 제72호 (50.7.25) 국방부장관 명령에 의하여 채병덕 영남편성관구 사령관(제2.4총참모장)과 민부대 예하 제30연대 (김용주 중령)일부 병력을 이끌고 27일 15시경 국도 2호선을 따라 하동읍으로 행진중이였다. 이미 소재공원 부근 180고지에 북한군이 좌.우 고지를 점령한후 미군의 하동행군을 유인하여 사정거리에 진입한 아군과 유엔군을 기습적으로 발포하여 채병덕장군과 한국군 미군이 대량 전사하게 되었다. 미제 25사단이 하동을 수복후 미군전사자 313명의 유골을 수습하였다. 적치하의 63일간 하동피해는 애국지사 168명이 학살되고 9월 25일 하동경찰서 (공산군내무서 보위부) 에 잡혀있던 우익인사 77명을 후퇴하면서 연행하여 화개탑리 연초조합창고에 가두어 놓은 것을 화개인사들이 보초병에게 술을 먹여 모두 탈출하도록 하는 애향심도 보였으며 하동읍 주택 수백호가 불타고 수억원의 재산피해를 입혔다. 공산당의 활동은 1946년부터 반미군정구호에서부터 암약하기 시작하여 전국노동자 평의회로 빌미삼아 대대적인 데모로 시작하여 진압경찰과 충돌후 경찰의 수배를 받자 지리산 백운산으로 숨어들어 빨찌산 활동을 시작하였고 북한군 패잔병등이 암약하던중 어려운 군민의 식량. 옷가지. 가축등을 약탈하고 청암지서 경찰초소등을 쉴새없이 습격하여 삶의 터전을 위협하였다. 이에 한청기동대. 하동경찰서의 큰역활과 수도사단 1개연대가 공비를 소탕하여 평정을 찾기에 이르렀다. 3.429명의 참전자 애향이 오늘의 살기좋은 하동역사의 한축의 수레바퀴의 기초가 되였고 하동역사에 영원이 기록되여 전후세대의 귀감을 삼고져하며 오늘의 안보불감증에 경종을 울려야 하고 친북좌경 세력이 개혁이란 이름아래 우리국가 기틀마져 뿌리채 흔드는 오늘의 현실이 6· 25 한국전쟁 발발전 상황과 유사하지 않은지 한번쯤 자성하여 보자. 국기(國基)을 흔들고 있는 반미 친북세력이 이나라를 주도할려고 한다면 다수의 안보세력이 침묵 할 것이 아니라 전선에서 싸웠던 그 용기로 낙선(落選) 운동이라도 하여야 할 당연한 안보단체로써의 의무가 아닐찌, 그리고 3월 10일 하동참전전우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하여 우리군민 모두가 애향의 자긍심으로 오늘의 시대적 사명감을 되새겨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