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군의 옛지명 다사촌(多沙村)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여 [다사왕비(多沙王妃)]라는 제목으로
인터넷 소설을 연재하고있는 방송작가 이상훈입니다. ( http://www.gomurim.com/ 자유연재란 '다사왕비' 참조 )
하동군의 특산물 재첩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재첩 미녀'란 소제목으로 소개하였고, 요즈음은 하동의 유명한 차재배단지 이야기를 소설로서 꾸며나가고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이 글을 읽고 어느 누가 혹시 이런 이의를 제기할는지도 모릅니다.
[다사왕비]의 시대적 배경을 기원전 훨씬 이전으로 정했다고 하면서,
어떻게 그 당시에 차(茶) 얘기가 나오고 또 차 재배지 얘기가 다 나오느냐구요.
물론 역사 기록에 의하면 신라 흥덕왕 3년 (828년) 대렴이 당나라에서 녹차씨를 처음 가져와 왕명으로 지리산 줄기에 위치한 지금의 경남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에 심었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점을 먼저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과연 우리 조상들은 그 이전에 술을 마시고나서 속쓰림이나 머리 아픔등등의 숙취 현상을 그냥 맹물만으로 해결하셨을까하는.....
커피와 홍차가 유럽에 처음 전해졌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매일 마셔도 정말로 괜찮은 건지 의심을 하는 등 한참 말이 많고 소란스러워지자 왕명에 의해 그것을 사형수 형제들에게 몇십년간 그들이 자연사할 때까지 매일 먹여보고나서 비로소 그 안전함을 인정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만약 신라 흥덕왕 이전에 우리 조상들이 차(茶) 같은 것을 전혀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면 틀림없이 차(茶)의 유무해에 관해 갑론을박하는 얘기들이 그 당시 기록으로 남아있을 터인데 그런 것은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왕께서 아무런 거부감도 없이 차를 마셨다는 것은 훨씬 그 이전부터 우리나라에 차(茶) 마시는 문화가 존재하였음을 뜻합니다. 게다가 하동군 진교면 백련리 도요지에서는 오래된 찻잔 비슷한 토기들이 수없이 많이 출토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 추리는 이렇습니다. 심지어 산과 들에 하찮게 피어나는 이름모를 풀 뿌리까지도 나물 찬거리로 이용할 줄 알았던 우리네 조상들에게 과음 숙취 제거용으로 차(茶) 같은 걸 마시는 문화는 틀림없이 존재했을 것이다. 다만, 기록으로 나와있는 신라 흥덕왕때에 대렴이 가져온 녹차씨는 품종이 우수한 것으로서 당시 우리네 토종 야생 차나무에서 나온 것보다 월등히 그 향과 맛이 나았을 뿐이다. 라고....
아무튼 다사왕비를 통하여 앞으로 하동군의 자랑거리들은 가급적이면 모두 빠짐없이 기록되어나가고자 노력할 것이오니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2004. 4. 5. 방송작가 리징 이상훈 올림.
고무림 http://www.gomurim.com/ 자유연재란 '다사왕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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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에서 이런 부분을 그만 빼놨군요...
신라흥덕왕때 대렴이 당에서 가져온 녹차씨를 가지고 경남하동군화개면운수리에 녹차시배지를 만들었던 이유는 아마도 그곳에 토종 야생 차나무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자라고있었거나 차나무 재배하기에 적절한 기후 토양이었을 것이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