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한 얼굴들
며칠 후면 6.25가 돌아옵니다. 전쟁의 폭풍이 가져다 준 상처도 상처려니와 6.25는 한반도라는 병을 들고 한바탕 뒤흔든 듯, 남과 북, 동과 서의 한국 사람들을 뒤섞어 놓았던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부산 지역에서 즐겨 먹는 '밀면'이라는 음식은 냉면에 익숙한 이북 출신 피난민들이 구할 수 없는 메밀 대신 미국산 원조 밀가루를 써서 만든 음식이 일반화한 것이고, 해방 즈음만 해도 서울 시내에서도 그리 흔치 않았다는 냉면은 이제 한국인이 가장 즐겨하는 외식거리 중의 하나가 됐지요. 아바이 순대니 평양 만두니 하는 이북들도 완연한 이남 사람들의 먹거리가 됐구요.
아마 전쟁이 아니었다면 (그 옛날에) 충청도 처녀가 평안도 총각에게 시집가서 평생을 이북식 콩비지 가게를 하게 되는 일도 없었겠지요. 청계천 4가 길가에 있는 강산옥의 주인 아주머니처럼 말입니다.
아주머니는 1.4 후퇴때 평양에서 남하한 집안으로 시집을 왔습니다. 시어머니에게서 콩비지를 배웠고, 가게를 열 때 시아버지는 '강산옥'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다지요. 두고 온 강산을 잊지 못하는 마음이었는지 가게 한 켠의 벽에는 평양성과 대동강을 촬영한 두 장의 사진이 오롯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북 손님 많은 식당들 여럿 방문해 봤지만 이 가게처럼 그 비율이 높은 집은 보지 못했습니다. 인터뷰들을 다시 보면 노다지 평안도 황해도 사투리들입니다.
"인간답게 사는 법, 열심히 사는 법, 그리고 음식같은 거는 이북 사람들이 이남 사람들한테 많이 개르쳐 줬지. 고럼!"
"고향이 평안남도 용강인데요. 어릴 적부터 이 콩비지를 식량 대용으로 먹어 놔서요."
그 중에 육군 병장 작대기처럼 이마에 네 가닥 주름살이 깊이 깊이 팬 노인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는 그 아들뻘되는 사람이 앉아 있었구요. 처음에는 일행인가 했는데 먼저 일어나 셈을 치러서 단순한 합석임을 알았지요. 그런데 그가 아주머니에게 조금 엉뚱한 소리를 합니다.
"저기 저 노인 양반 밥값 내가 낼께요. 아버지 생각이 나서......"
앗. 이렇게 따스한 미담이 발생하다니...... 저는 즉시 카메라를 들고 총총 가게문을 나선 효자(?)의 뒤를 추격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는 인터뷰를 완강히 거절했지요. 입맛을 쩍쩍 다시면서 어떻게든 설득을 해 볼 양으로 말을 붙여 봤습니다.
"아까 그 노인이 아버지를 닮으셨나 봐요?"
"닮았냐구요? 글쎄요 난 아버지 얼굴을 못봐서....."
"네? 아니 아까 아버지 생각난다고.... 밥값 대신 내 주셨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내가 뱃속에 있을 때 전쟁에 나가서 행방불명되셨어요. 난 아버지를 스무살 청년 얼굴로밖에 모르지. 생각이 나는 건 어머니가 아버지 생신날 제사를 드렸는데 그때 콩비지를 꼭 해서 올려 주셨어요. 그렇게 좋아하시는 음식이었다두만."
"네에.... 그런데 듣기로 콩비지는 이북 음식인데.....고향이 이북이세요?"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어떻게든 아저씨의 인터뷰를 끌어내려고 애쓰는 제게 이제 초로에 접어든 전쟁 유복자는 아주 난처한 상대를 만났다는 듯 제 눈길을 피하며 말했습니다.
"인민군이었어요. 그래서 인터뷰 하기 싫은 거요. 그럼 안녕히 계슈. 미안하우."
혹시 자기 옷자락을 잡고 인터뷰를 청할까 두려워라도 했는지 그는 뛰다시피 가게 앞을 떠났습니다만 저는 한 대 맞은 듯 멍하니 그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인민군의 유복자가 어떤 인생유전을 거쳐 서울 한복판의 콩비지 식당에서 저와 조우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점심 식사 시간, 앞에서 콩비지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던 한 노인의 얼굴에 스무살 청년으로만 남은 아버지를 오버랩시킨 한 아들의 애틋함은 저녁놀처럼 붉게 제 마음에 내려앉았지요.
얼마 전 옛 싸움터에서 어느 유골의 생전 모습을 담은 사진이 생생하게 발견되어 수십년만에 그 가족에게 돌아간 적이 있습니다. 고등고시를 준비 중이었다는 아주 잘생기고 총명해 보이는 사진은 50년 동안이나 땅에 파묻힌 채 햇볕 보기를 기다렸겠죠. 그리고 사진조차 남기지 못한 수많은 유골들은 자신이 파묻힌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돌아간 날도 모른채 자신의 생일에 제사밥을 올리는 가족들의 곁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겠지요.
어제 만리타향의 한 전쟁터에서,대한민국 국군이 일익을 담당한다는 그 전쟁터에서 한 청년이 적의에 불타는 무장 세력에게 납치되었습니다. 목사가 되기를 소망했던 한 청년은 울부짖으며 나는 살고 싶으며, 한국군은 나가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50년 전 고등고시를 꿈꾸던 전라도 청년이 총 든 병사가 되어 누군가와 싸우다가 산 설고 물 설은 강원도 땅 속에서 백골로 변해 갔듯이, 어쩌면 2004년의 김선일씨는 그가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를 죽이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목이 잘릴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오늘 그 불행한 인질의 절규를 보면서 김선일씨의 창백한 얼굴 위로 땅 속에서 발견된 나 일병의 잘생긴 얼굴이, 그리고 50년만에 찾아온 혈육의 흔적에 눈물 짓던 가족들의 얼굴과 두려움과 공포에 말을 잇지 못하는 김선일씨의 부모의 얼굴이 차례로 겹쳐 보입니다. 만약 김선일씨가 이라크 무장 세력에 의해 살해당한다면 어쩌면 그 부모와 가족은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슬픔과 누구에게 향해야 할지 모를 분노를 가슴 속에 가두고, 김선일씨의 영정 앞에 그가 즐기던 음식을 올려야 하겠지요. 콩비지집의 인민군의 아들처럼 말입니다.
전쟁은 아직 우리 곁을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니거니와, 절대로 다시는 상종 말아야 할 몹쓸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몹쓸 것과 굳이 키스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지경에 이르고서도 파병은 불가피하며 국익에 이롭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이라크의 무장 세력에게보다 더 한 분노의 화살을 겨누고 싶습니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난 탄핵 당시에 제 주위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도 안되는 탄핵에 분노했고 당신을 위한다기보다는 부당한 탄핵에 항의하기 위해서 촛불을 들었습니다. 그때 한 친구는 그런 표현을 썼지요. 이로써 노무현 정권에 대한 AS는 끝났다구요. 만약 김선일씨가 목숨을 잃고, 삼성전자 대리점이 습격당하는 상황에서도 ‘파병은 국익’이라고 우기게 된다면, 당신은 당신을 지켰던 촛불로부터 포위될 것입니다. 그때는 AS가 아닌 리콜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당신을 대통령으로 뽑은 사람들로부터 말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얼굴 또한 불행한 얼굴, 많은 이들을 불행하게 만든 얼굴로 기억될 것입니다. 제발 그러지 않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