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이 버린 애국자 로버트 김
글쓴이 : 곽호성 글 올린 시간 : 2004-06-02 오후 12:0 조 회 : 8470 추천 : 52
로버트 김이 돌아온다. 이미 로버트 김은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어 굳이 설명을 할 필요가 없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혹시 모르는 이들을 위해 약간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로버트 김은 미국 해군정보국의 컴퓨터 전문가였다. 해군정보국에서 근무하던 중 한국 해군 소속으로 미국에 파견되었던 외교관 신분의 무관 백동일 대령을 만났고 동맹국 한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북한 관련 정보를 한국에 제대로 주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고 해군정보국의 정보 가운데 극히 일부를 백동일 대령에게 전달했다.
여기서 로버트 김과 백동일 대령은 큰 실수를 저질렀다. 우선 로버트 김과 백동일 대령은 내심 이런 행동이 스파이 행위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본인은 로버트 김 석방위원회가 99년 펴낸 '나는 한국인입니까. 미국인입니까?'(자작나무 출판)란 제목의 책을 우연한 기회에 입수했다.
이 책의 내용을 읽어보면 백동일 대령은 그에게 기밀이 아닌 정보를 혹시 받을 수 없겠느냐고 부탁해 온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백동일 대령은 설마 로버트 김이 자신의 지원요청에 기밀정보까지 꺼내서 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책에서 등장하는 대화내용 한 줄만 갖고 본인이 추측한 것이므로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다만 백동일 대령은 기밀이 아닌 정보만 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조국의 어려움에 강한 애국심이 발동한 로버트 김이 기밀까지 꺼내주는 무리를 했을 수도 있다는 근거가 극히 부족한 추측일 따름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백동일 대령과 로버트 김은 자신들이 스파이 행위를 한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로버트 김은 자기 사무실의 팩스로 문건을 보냈고 백동일 대령으로부터 어떠한 금전적 보상을 받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 있는 상태다. 이것은 현재 로버트 김이 만기출소를 앞두고 집에서 남은 형기를 보내는 제도의 혜택을 받아 집에 와 있지만 수감생활의 결과로 연금과 같은 경제적 보상이 모두 중단되어 상당한 경제적 고통을 겪고 있음을 생각할 때 간접적으로 증명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로버트 김 사건의 이면
이 책에서는 로버트 김을 전반적으로 옹호하면서 미국 정부와 한국 정부 간 외교게임에 로버트 김과 백동일 대령,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희생양이 되었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로버트 김 사건이 일어났을 시점은 1996년 북한의 동해 잠수함 침투 사건이 일어났던 해였다. 한국 정부의 강경파는 미국 정부에 대해 북한에 대한 매우 강경한 대응을 요구했고 미국 정부는 한국 강경파의 대북 강경 태도 요구에 적지 않은 부담을 느끼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 이 책의 지적이다.
한국 강경파의 요구가 북·미 간의 기본 합의를 깨고 남북 관계를 경색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미국은 잠수함 사건으로 인해 생긴 파장을 가급적 최소화하고 싶었으나 한국의 강경파들은 미국이 철저하게 북한에 타격을 주길 원했던 모양이다.
이 책의 주장은 이런 한·미 간 갈등이 표면화된 상황에서 이 갈등을 누그러뜨리는 명분으로 미국 측이 로버트 김 사건을 이용해 한국 내 강경파를 몰아세웠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증명할 수는 없겠으나 어느 정도 신빙성은 있어 보인다.
이 책에서는 로버트 김 사건이 필요 이상으로 부풀려진 측면이 없지 않아 있으며 한·미 간 외교루트를 통해 조용히 해결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로버트 김 사건 수사 과정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았고 로버트 김에게 필요 이상의 높은 형량이 떨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선 미국 측이 로버트 김과 백동일 대령 간 관계를 포착하고 수개월의 기간 동안 두 사람을 도청과 비밀 촬영 등의 수단으로 감시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초기에 사건을 정리하지 않아서 오히려 로버트 김 사건을 더욱 키운 점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근본적으로 한·미 양국이 서로 강한 동맹관계였고 로버트 김이 유출한 정보들이 미국 자체의 안보위협을 주는 것이 아니었다고 이 책에서는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로버트 김 사건에 있어 미국 사법부의 높은 구형은 강경으로 치닫던 한국 정부에 대해 모종의 메시지를 주기 위한 의도가 아닐까 하고 이 책에서는 추측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이 책은 로버트 김을 옹호하는 입장의 이들이 쓴 것이기 때문에 객관성이란 측면에서 다소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 일단 로버트 김은 미국의 중요 정보를 빼내 한국 측에 전달했고 이 자체는 일단 범죄로 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로버트 김 사건의 여러 가지 주변 상황으로 보아 로버트 김에게 떨어진 구형은 너무 가혹한 것이었지만 이에 대한 한국 정부의 대응은 극히 미온적이고 소극적인 것이었다. 한국 정부는 로버트 김 사건의 파장이 커져 한·미 간 갈등으로 비화되는 것을 극히 두려워한 것으로 보인다.
로버트 김의 일가족은 사회 각계를 찾아다니며 로버트 김의 구명을 시도했고 김종필 총리까지 만나 부탁을 했지만 결국 로버트 김에 대한 소극적인 한국 정부의 태도를 바꾸는 데는 실패했다.
최근 로버트 김의 부친 김상영 옹은 끝내 아들을 보지 못한 채 한을 안고 생을 마감해야 했다. 오히려 로버트 김 사건에서 한 가지 이채로운 사안은 로버트 김의 동생 김성곤 의원이 [현 열린우리당 의원] 새정치국민회의 의원이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오히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로버트 김 사건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고 금일봉을 전달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또한 로버트 김을 구원하기 위해 만든 단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유재건 의원과 같은 새정치국민회의 의원과 그 주변세력으로 알려져 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한국의 안보를 위해 로버트 김은 미국의 기밀정보를 빼내는 노력을 하고 그 대가로 투옥되는 운명을 맞았지만 안보의 중요성을 소리 높여 외치고 북한을 제압하려 했던 한국의 보수세력과 정부는 전반적으로 로버트 김 문제에 대해 미온적인 입장을 보였다는 것이다.
로버트 김의 시련과 반(反)보수세력의 번성
로버트 김은 이번 사건의 결과로 엄청난 시련을 맞았다. 로버트 김의 경제적 손실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는 이번 사건 때문에 파산선고를 받았고 그의 친인척들은 그의 법률 투쟁 비용을 대기 위해 상당한 경제적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로버트 김 측은 미국 법률사회의 특성을 잘 몰라 로버트 김을 오히려 더욱 궁지에 빠뜨린 부분도 있다고 이 책에서는 적고 있다. 로버트 김은 한국 사회의 관선변호사만 생각하고 형사법에 능통한 미국 법정이 선임해 준 관선변호사 대신 민선변호사를 고용했다.
그러나 로버트 김이 선임한 민선변호사는 형사법에 능통하지 못해 로버트 김을 어려움에 빠뜨리고 말았다. 그 와중에서 로버트 김은 많은 재산을 변호사 비용으로 지출해 결국 혼자 법률 공부를 해서 미국 사법부와 싸워야 하는 비참한 상황에 놓였던 적도 있다.
정신적 고통 또한 적지 않다. 미국의 일부 언론들은 로버트 김이 마치 한국 정부로부터 엄청난 돈을 받기로 한 것으로 약속하고 정보를 유출시켰다고 내다보는 악의적 보도를 했고 그로 인해 로버트 김과 그 일가족과 가까이 지내던 미국인들은 그들을 버리고 멀어져 갔다고 이 책에서는 적고 있다.
또한 이 책은 당시 미국에 거주하던 한국인들이 로버트 김 사건으로 인해 적지 않은 미국인들의 의구심 섞인 시선에 시달려야 했다고 적고 있다. 피해를 입은 것은 로버트 김과 가족들 외에 백동일 대령 역시 포함된다.
백동일 대령은 사건 발생 이후 로버트 김에게 위로의 뜻을 전하는 편지와 함께 자신의 월급을 변호사 비용으로 쓰라고 보내오기도 했다고 한다. 백동일 대령은 사건의 여파로 국내로 귀국해야 했고 한동안 특별한 보직 없이 지내다 책 출간 당시에는 해군의 한직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 역시 로버트 김 사건의 피해자임은 분명하다.
로버트 김 사건이 소개된 이후 많은 한국 국민들은 한국 정부에 적지 않은 배신감을 느꼈다. 물론 혈맹이고 우방을 강조해왔던 미국 측의 냉정한 처사에 실망한 것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나 많은 국민들을 더욱 실망시킨 것은 한국 정부와 친미적인 입장을 견지해왔던 한국의 보수층들 가운데 상당수가 로버트 김 사건에 미온적인 입장을 보이며 문제 해결을 회피해 왔다는 것이다. 로버트 김이 그들이 그토록 중시하는 국가안보를 위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많은 보수 세력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반미 정서의 확산을 경계하고 있다. 그러나 로버트 김 사건의 과정을 지켜 본 한국 국민들 가운데 미국에 대한 불편한 감정과 한국 정부와 보수층에 대한 절망에 가까운 실망을 느끼지 않은 이들이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 반미정서가 무섭게 확산될 수 있었던 데에는 반미적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이 여론의 주도권을 점하고 있었던 것이 직접적 원인이지만 로버트 김 사건과 같은 상황에서 보여 준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의 태도는 반미정서를 더욱 강하게 만드는데 일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한국은 미국에 대해 할 말은 당당히 한다는 참여정부의 시대를 맞고 있다. 참여정부는 이미 대권 뿐 만 아니라 국회에서의 과반수 이상 의석 점유로 무시할 수 없는 권력을 갖게 되었다.
이들은 로버트 김 사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이들 역시 로버트 김 사건을 '냉전적 대결의식에 사로잡힌 한 재미 한국인 군무원의 소영웅의식에서 나온 모험적 행위'로 받아들이고 넘어갈지, 아니면 '한국을 위해 희생한 애국자'로 분명히 인정하고 넘어갈지 이들의 판단이 궁금하기 짝이 없다.
우리는 많은 것을 잊고 산다. 흔히 한국인을 가리켜 '3일 두뇌의 사람들'이라고 조소하는 이들도 있다. 어떤 큰일도 3일만 지나면 까맣게 잊어버린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로버트 김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정부와 한국 보수세력은 시간은 너무 늦었지만 로버트 김을 위해 뭔가 움직임을 보여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미국에 대해 할 말은 당당히 하겠다는 열린우리당 정부의 합당한 태도이며 보수세력의 로버트 김 후원은 그들이 그렇게 강조해 마지않는 안보를 위해 헌신한 로버트 김을 위해 당연한 보상일 것이다.
로버트 김 석방위원회가 펴낸 로버트 김 사건의 전말을 다룬 책의 제목은 '나는 한국인입니까. 미국인입니까?'이다. 그는 우리에게 자신이 한국인인지, 미국인인지 묻고 있다. 한국과 미국 양국 모두에게 잊혀지고 외면 받았던 '잊혀진 애국자' 로버트 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