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자유민주주의 딸깍발이다〃
하동군재향군인회장 성 금 성
과거의 상황은 과거의 사회환경에서 조명되어야 하는 것이 역사의 진실임을, 현재의 잣대로 조명하는 것은 역사의 오류이며 그 오류를 왜곡하여 어리석음을 범하며 삶의질을 하향 평준화 시키면서 그 개혁의 주체들이 사회를 이분법으로 내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개념으로 매도하는 사회는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아픈 것은 못 참는」 풍토가 언제부터 만연되었는지 모르지만 현재 가장 평안하게 잘 나가는 길은 「반미를 주장하고 개혁세력」 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 처세술이지, 찬미로 낙인찍히면 앞으로 좋은 일이 없을 것이며 더욱이 보수세력 이라면 볼 짱 다본 사람이라는 사회환경입니다.
돌이겨 보면 1946. 2.8 이북 진남포에 평양학원 제2군관학교를 설립하여 김일성을 위시한 소련파가 중심이 되어 공산정권을 수립하는데 필요한 정치간부를 양성하고 각급 인민위원회 간부, 각 지방 교육기관의 교관 인민군 창설기간요원, 정치보위부 간부로 수료생을 배치하고 대남반까지 두어 대남간첩과 유격대원을 양성하다가 대남반은 강동 정치학원으로 흡수하였고,
1947년 9월에 김일성파는 소련 군정지도하에 평남 강동군 승호면 입석리 일제때 탄광 사무소와 합숙소를 개조하여 강동 정치학원을 설립하여 빨치산 3천여명을 훈련시켜 그 중에 지리산 공비두목인 이현상도 강동정치학원 수료생입니다.
해방 이듬해 1946년 9월 대구 섬유산업 철도등 총파업이 우리나라 첫 데모며 그 데모가 10월 1일 영남폭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영남폭동 처음에는 대구 역전 광장에서 식량배급을 달라는 군중 200~300명이 모인 군중 데모였습니다.
공산당의 민족전선의 시 , 도 의장단급 회의후 청총, 민청, 부녀동맹, 농민조합간부, 문련산하 각급동맹 학생회 간부등 전조직을 동원하여 공산당 선동자들이 돌맹이를 경찰로 향해 던지고 진압 경찰의 대응을 유도하는 선제공격에 경찰이 참지 못하고 위협발표를 하여 연탄 공장근로자 한사람이 다쳤을 뿐인데 조선공산당 대구시 학생담당 비밀당원인 대구의과대학 4학년 최무학은 호열자(요즘 콜레라)로 죽은 시체를 가져와 경찰이 사람을 죽였다하고 데모를 하므로 인해 군중시위는 마침내 대대적인 폭동으로 변하였으며 데모대는 해방의 노래, 혁명가, 적기가를 부르면서 대구 경찰서를 포위하고 이성옥 서장을 무장해제시키고 신재석 보안과장이 투항연설로 여러분 편에 서서 싸우겠다며 인민공화국 만세를 삼창까지 하는 공산당의 전술전략이 편승된 도화선이 폭동으로 변한 것 입니다.
대구 , 경북지방은 치안 부재상태가 되었으며 경찰서장등, 간부, 순경은 맞아 죽는 현실이었습니다.
공산당은 지금도 「총구로부터 정권이 탄생한다는」모택동의 말은 공산당 만고의 진리이며
정치투쟁은 폭력투쟁이며 사상투쟁부터 한다는 레닌의 주장이 조선 공산당이론의 투쟁전술의 기조가 되었습니다.
1946년 7월 중순 조선공산당의 전위조직인 노동조합 전국평의회에서 공산당의 신전술 지령에 입각하여 건평상무위원회의 채택으로 파업계획에 의하여 9월 23일 부산철도노조 7천여명 파업과 전국 철도종업원 4만여명이 일제히 파업하므로 인해 우리나라 운송은 마비된 상황이였습니다.
광복의 해에 가뭄도 그런 가뭄이 없었고 이듬해는 대홍수로 전답과 집이 떠내려갔으며 호열자가 만연하고 허기진 보리고개 시기에
공산당은 농촌에 강제 공출한 쌀을 미국으로 실어간다는 인민위원회 선전부의 말에 굶주린 서민들은 미군이 저주의 대상이였을것입니다.
미국이 우리나라에 쌀을 가져갈 나라입니까?
10월 폭동이후 남한 공산주의 세력의 혁명투쟁이 계속 과격으로 흐르면서 공산당의 투쟁수단이 폭력행사 및 정치투쟁으로 1948년 들어 2. 7 구국투쟁, 3. 1절 기념투쟁, 야산대투쟁, 5.10 총선 반대 투쟁, 제주도 4. 3 폭동, 6. 10반동 숙청 투쟁, 10월 여순반란에 이은 빨치산 투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1948년 1월 평양의 대남 유격 투쟁 합동참모본부는 남한의 5.10 총선거 방해목적으로 2. 7구국 투쟁계획을 세워 그 연쇄작전으로 제주도 대폭동을 구상해 공산당 중앙 파견단 총책 강문석을 제주도로 보냈고 그의 안내 책임은 전남도 당 군사부책 조경순 전남도립 병원 간호사로서 여순반란사건의 주모자 김지회의 내연의 처였고 강문석은 남로당 제주위원회 군사부장 김달삼의 장인이기도 했습니다.
김달삼은 이북 국기훈장1급과 공화국 영웅칭호를 김일성이가 주었으며 김달삼은 다시 태백산 유격 전구 사령관으로 활동하였고
이 현상은 평양의 대남 유격투쟁 합동 참모 본부에서 특파한 지리산 유격전구 사령관입니다.
지리산 유격전구 이 현상은 여수 제14연대, 광주 제4연대, 경남 마산의 15연대, 전주의 제3연대, 군산의 12연대의 반란을 일으키게 하는 책임자로 영남 및 태백산 유격전구에서는 대구 제6연대 (남로당 세포총책 곽종진상사)의 주축으로 부산 제5연대, 청주7연대 오대산 유격전구에서는 강릉 제8연대 제3대대(남로당 세포총책 박인욱상사) 주축으로 춘천의 1대대, 원주의 2대대, 유격전구의 무력확보에 주력토록 평양의 지령이었으나 여수 주둔 제14연대만 공산당평가로 성공하였다 평가했으나 김일성은 남한의 전국 군대에, 북괴는 프라치나 공산당원을 군에 침투시겼습니다.
여수주둔 국군 제14연대는 제주 4.3폭동 진압부대로 출동 명령시 우리나라 국군 부대중 가장 많은 화력을 가진 부대로 이 현상의 지시에 의해 김지회의 반란에 의해 여 ․ 순반란 사건이 조직적으로 발발한 것입니다.
간첩이 군장성을 조사하고 간첩이 민주투사가 되는 이 현란한 오늘이 6.25 전야와 무엇이 어떻게 다르다고 보고 있습니까?
해방으로 5년뒤 1950년 6월 25일 그 이전의 사회와 오늘의 사회를 한번 비교할 필요가 있지 않습니까?
지난 역사는 우리의 교훈입니다.
뒤돌아 보는 것은 불행을 막는 길이요 우리 지난 날의 고생과 삶의 사투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좌익세력들은 진보 운동세력이라 칭하고 이들이 말하는 “진보”라는 의미는 공산주의 창시자인 막스(K.Marx)의 역사발전 5단계설인 원시공동사회, 고대노예사회, 중세기 봉건사회, 자본주의 사회,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가 온다는 공산주의의 역사관입니다.
이 역사의식에 좌익권은 자본주의를 역사발전의 보수 반동이 되고 공산주의가 역사발전의 진보가 된다고 주장합니다.
해방과 동시 3, 8 이북에는 김일성을 위시한 공산당이 6, 25전까지 5년간 남한사회를 혼동의 사회로 만들기 위해 부단위 노력했고 제2단계로 60년대부터까지 갑첩침투로 제3단계로 70년대부터 합법적인 틀 밖에서 정치활동을 하는 재야권과 지하권 좌익 운동권으로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 진보정치연합 전국 민주노동조합 총연맹과 ML주사파, PD파, NDR파, 트로키파라는 좌익 혁명권등이 있습니다.
좌익운동의 개념은 한국사회의 모순을 해결한다는 미명하에
현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고 막스레닌주의 김일성 주체사상에 입각하여 계급 투쟁에 의한 폭력 혁명으로 사회주의 건설을 지향한다는 세력입니다.
1970년대부터 국내에 들어와 이들의 급진사상은 1980년 중반까지 우리나라 좌익운동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전국 연합, 전총련, 범민련, 한총련(한국대학생 총학생회 연합)등 공개된 운동세력은 자기들 목표를 숨긴채 독재타도 민주화쟁취 민중이 주인되고 노동자가 주인되는 사회건설 자주 민주 통일의 새사회 건설 운운하며 진정한 이상적 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하려는양 위장하고 있으나 자유민주주의 체제 변혁 운동이 아니라고 항변할 수 있다면 그들의 진정한 목적과 행동을 예의주시 할 필요가 있습니다.
범청학련, 범민련 이들 주사파세력들은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인 자유민주주의사상을 부정한채 구국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자주, 민주, 통일을 반미자주 반파쇼민주와 조국통일투쟁등을 1970. 11 북한 제5차 당대회에서 채택한 대남 투쟁노선을 그대로 행동 실천하는 좌경화 개혁 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
한총련의 전신인 전대협 1991.1.1 신년사는 이북의 대남혁명투쟁지침 기본골격이었으며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철폐, 양심수 석방, 안기부 기무사 경찰보안실 해체였으나 지금은 그것이 무르익어 이제 간첩이 군의 장성을 조사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세계는 공산주의, 사회주의가 없어지는 현실에 유독 우리나라만 진보 급진세력이란 사회주의의 망령이 나타나 세상을 뒤흔들고 있습니다.
경제 11위권이면서 우리나라 경제는 날로 침체되고 더욱 살기 어려운 시대로 가면서 개혁은 무엇을 어떻게 개혁하여 더 살기좋은 세상으로 간다는 것인지 우린 냉철히 판단하여야 합니다.
개혁은 합의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개혁이며 국민이 모두 잘살기 위한 개혁이어야 합니다.
김대중정권이 들오서고 6.15 남북공동선언의 계기로 햇볕에 가려진 사회에서 좌경화된 개혁세력이 우리사회에 주인이 되는 주류가 되었습니다.
한국사회는 현재 진보관 개혁파가 득세하고 진보는 경쟁과 성장보다 평등과 분배의 논리를 중시하다 보니 회사는 외국으로 나가고 실업자는 날로 늘어나고 이 정부는 국내용 과거사에 모든 것을 걸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西海에서 남침한 북한 경비정에 대해 자위조치 차원에서 정당하게 경고사격을 한 국군이 무슨 역적모의라도 한 것처럼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문제삼고 국군에 대해서는 잔인할 정도로 용감한 정권은 중국어선으로
위장하여 남침한 북한 경비정에 대해서는 왜 한마디의 항의도 하지 못하는지 안타까운 심정입니다.
일본과 싸운 민족주의자는 정의며 선이지만, 반미를 외치는 민족주의자는 진보라 하는데 누구를 위한 민족주의 인가.
정치는 반미이고 경제는 친미는 오래 지속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미국이 물러간 자리는 누가 차지 할 것입니까.
반미숭중(反美崇中) 이라는 말은 언제부터 나왔습니까?
미국이 물러간 자리는 자연히 중국이 차지 할 것이 아닌가 ?
앞으로 우리나라도 진보가 득세하면 그와 함께 경제는 자연 후퇴 할 것이며, 노동단체 전성기를 맞이하면 기업은 서서히 사라질 것입니다.
시민 단체의 좌경화 힘이 요동치면 우리 서민만 핍박과 서러움을 받을 것입니다.
역사상 지도자들의 잘못으로 백성을 괴롭힌 역사가 얼마나 많습니까.
10년내 중국의 기술은 우리를 능가 할 조짐입니다.
이 나라는 어디쯤 있겠습니까?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젊음을 바쳤습니다. 대통령 직속기관인 의문사 진상위원회 논리라면 6,25자유수호 전쟁에 참전한 유공자
3,8선을 오늘까지 지킨 향군은 반민주세력입니까?
지금 60만 국군은 또한 반민주국군 입니까?
진보란 개혁세력에 묻고 싶습니다.
사회주의 국가는 왜 못살고 배고파 죽는자가 많은지 우리가 현재보고 있고 우리가 쌀을 보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나라 자유와 번영을 위해 지금까지 혼신의 힘을 다하여 살아왔고 살아 갈 것입니다.
우리는 흔들리지 말고 초심으로 끝가지 이 나라 이 민족 이 하동을 위해 살아가리라 믿습니다.
그것은 나라사랑과 하동의 애향이 항상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