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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봉 칼럼] 하동(河東)으로 가보세
하동은 첫 자락부터 끝자락까지 자연이 뭉텅이로 살아 숨 쉬는 연체동물이다.
수억 년 동안 지리산 계곡의 굵은 바윗돌을 사금처럼 잘게 부수어 섬진강 팔십 리 강바닥에 깔아놓은 하신(河神)의 작업은 오늘도 볼 수 있고 내일도 가면 볼 수 있다.
하동군(河東郡)을 삼신산(三神山)이 분만한 가장 아름다운 옥동자에 비교하면 과찬일까?
5월의 하동 땅에 성큼 첫 발만 내딛어도 현대병과 공해병에 찌든 심신이 금세 제 활력을 찾는다.
또한 산비탈에 군락을 이룬 야생차에서 풍겨 나오는 향기는 40년 대 배고픈 시절 부엌 모퉁이를 기웃거리면 엄마가 밉지 않은 시선으로 노려보며 형들 몰래 쥐어주던 누룽지 냄새마냥 고소하다.
차와 불교는 연리지(連理枝)처럼 떼놓을 수 없는 관계로 얽혀 있다.
운문선사는(雲門禪師)는 수행자나 신도들이 찾아와 도를 물으면 “차나 한 잔 하고 가지?”라는 선문답으로 직지(直指: 도를 찾는 방법)를 가르쳤다고 할 정도로 차 얘기는 고승열전(高僧列傳)에 수없이 등장한다.
명품 차는 역사로 따지는 게 아니라 질로 가늠한다.
가장 좋은 차는 평지나 기름진 땅이 아니라 야산, 특히 척박하고 험준한 비탈이나 산자락의 비전박토((菲田薄土)에서 생산되는 것을 상품으로 쳐준다.
적당한 햇볕과 그늘, 심한 일교차, 15도 이상의 경사진 곳에서 자라는 차나무는 사향처럼 귀한 것이다.
또한 강변이나 깊은 계곡의 산자락에서 운무(雲霧)의 이슬을 먹고 자란 찻잎은 이파리 하나하나가 황금과 값이 비교된다.
야생차는 향기만 좋은 게 아니라 자라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식하면 죽기 때문에 정절(貞節)의 나무라하여 예전에는 군자수(君子樹)라는 호칭도 부여받았다.
한국 차의 최초의 시배 지를 가야사(伽倻史)에서는 허 왕후가 인도에서 가져온 김해지방의 장군차(將軍茶)로 기록하고 있으나 지금은 거의 멸종되고 인공재배로 장군차를 살리려는 노력을 기울이지만 대다수 다인들은 하동 야생차인 작설차를 으뜸으로 친다.
한겨울 엄동을 이겨내고 곡우(穀雨) 전후를 주기로 채엽(採葉)한 것을 상품인 우전차(雨前茶)라고 하고 잎의 생김새가 참새의 혓바닥 같다고 해서 작설(雀舌)로 표현한다.
고려 말 명재상이었던 익재 이제현(益齊 李齊賢) 선생의 문집에 “가을 홍시 먼저 보내주고 봄날 볶아 만든 작설도 여러 번 나눠 주셨네” 라며 한 스님에게 고마움을 표현한 대목이 있는데 야생차의 대명사를 작설로 부르는 데는 다인(茶人)들도 별 이견이 없다.
하동의 야생차는 발효차가 아닌 불발효차로 불린다. 발효차는 우롱차나 보이차를 말함이지 찻잎을 십여 번 가마솥에 볶아 찻잎 자체에 존재하는 폴리페놀옥시데이즈(polyrhenol dxidase)라는 산화작용을 통해 만들어지는 작설차는 약주 등 원료나 잎을 꿀이나 설탕, 술을 부어 만든 발효차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중국이나 일본 등에도 부초차라하여 덖어내는 차가 있다.
그러나 일본사람들은 불발효차보다 잎을 쪄서 말리는 찐차 즉, 쪄서 산화효소작용을 중지시킨 중제차를 즐겨 마신다.
감잎차가 그 좋은 예에 속한다.
범해 각안(梵海 覺岸) 스님은 초의선사의 제자다.
그 분이 쓴 문집에 초의차(草衣茶)란 시(詩) 역시 작설차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곡우 맑은 날/ 노란 싹 잎은 아직 피지 않았네/솥에서 덖어내고 그늘에서 말린다/모나거나 둥근 차 찍어내고/죽순 껍질로 포장하여/ 바깥바람 들지 않게 간수하니/찻잔에 향기 가득하네.”
이처럼 차는 뜨거운 가마솥에서 자기 몸을 열 번을 넘게 덖어 나와 인간의 심신을 맑게 해준다.
그런데도 나이가 지천명(50세)이나 이순(60세)을 넘은 사람들 가운데도 평생을 정치와 법과 공직과 학문과 언론과 종교를 거쳐 나왔는데도 향기는커녕 역한 비린내가 나는 무리들이 있다.
그런 친구들을 찻잎 덖어내는 솥 안에 팍 쳐 넣어 댓 번만 볶아주면 향기 나는 인간 작설차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인생은 일장춘몽(一場春夢). 그 허망한 꿈이 깨기 전에 세속의 찌든 탐욕 모두 버리고 하동으로 가보세.
평사리 박경리의 토지를 거쳐 칠불암과 쌍계사를 다녀와 화계장터 쟁반위에 오른 싱싱한 은어와 참게탕, 재첩국을 시식한 다음 작설차 댓 잔을 마시며 하루쯤은 섬진강의 하백(河伯:)과 수로부인(水路夫人)이 되고 지리산의 신선(神仙)과 선녀(仙女)가 돼 보는 것도 좋겠지.
/ 논설위원 (2009-05-18)